제 19회 관객리뷰단


제19회 경쟁부문 <자유연기> 리뷰

자유연기  The Monologue  (김도영, 2018, 극, 29min, 국내경쟁)


<자유연기>는 두 가지 의미를 낳는 제목이다. 먼저 생략된 문장이 궁금하다. 자유와 연기 사이. “자유롭게 연기해보세요”일까. 혹은 “자유를 연기해보세요”일까. 자유로운 자는 전자처럼 말할 것이고, 자유롭지 못한 자는 후자처럼 들을 것이다. 지연(강말금 분)의 입장에서 “자유연기”는 후자다. ‘연기(acting)’가 영화에서 배치되는 지점을 생각하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자유롭고 싶다”면,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연기하고 있는 게다. 그렇다면, <자유연기>의 제목은 풀어 읽혀야 한다. “자유를 연기하기” 또는 “자유로운 체, 연기하며 살아가기”

(<자유연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이 그러하듯)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움’의 상대적 위치는 다르다. 흔히 말하는 1세계 백인 부르주아 남성을 시작으로, 3세계 흑인 무산계급 여성까지. 우리들은 점차 “부자유”해진다. 자유로운 사람의 가장 큰 장점은, 삶의 환경을 객관적 대상으로 유희할 수 있단 점이다. <자유연기>가 천착하는 지점은, 엄마의 몸이다. 수유를 해야 하는 지연의 가슴이, 오직 “예쁘게” 보인다거나. 아이의 높은 목소리에서 “가수”를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자유로운 자들은, 부자유한 자의 삶에서 비린내를 탈취한다.

물론, 본인이 이러한 사실을 안다고 해서 부자유한 사람들의 환경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는 본인은 정상적 몸의 규준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이성애자 남성이며, 세상을 대단히 “평탄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혹은 우리가) <자유연기>의 지연이 결심하는 얼굴을 볼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아코디언을 오랜만에 만질 때 한 번, 오디션 장에 들어가며 한 번. 우리는 기대하는 (혹은 걱정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자유연기>의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은 오직 일상이다. 그것을 내보일 때만(연기를 통해서) 우리는 그 자리에 설 기회를 가질 뿐이다.

스타니슬랍스키에 의해 연출, 모스크바 극장에서 상연된 1899년의 <갈매기>를 체호프는 대단히 싫어했다고 한다. 작품을 읽는 시선의 차이였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체호프의 희곡을 비극으로 읽었는데 반해, 체호프는 자신의 극을 언제나 ‘희극’이라고 규정했다. 그의 유명한 희곡이 모두 통상적 베드엔딩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체호프는 희극을 개인적 정서를 뛰어넘는 일상을 담은 이야기로 본 것 같다. 실존적 불안의 순간을 가만두지 않는, 거대한 일상의 흐름. 그렇다면 <자유연기>는 어떨까. 비극적 삶을 내보이는 순간, 때맞춰 터지는 일상-젖-의 삑사리! 체호프의 관점에서, <자유연기>는 희극이다. 지연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이며, 남편도 철이 들지는 않을 게다. 비극의 순간을 뒤로 하고, 일상은 유유히 흘러갈 것이다.

아직! 조금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남았다. 공교롭게도 <자유연기>에는 체호프의 <갈매기>와 함께 다른 문학 작품의 제목이 등장한다. (다른 작가의 다른 내용이지만) 이상의 <날개>다. 논쟁이 있는 사안이지만, 근래 연구에 의하면 <날개>의 마지막 대사는 자살을 암시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미츠코시 백화점을 나서며 이상이 외쳤던 말은, 희망의 말인 게다. 나는 이 문장을 오디션 장을 나서던 지연에게 전달해주고 싶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 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제19회 대구단편영화제 관객리뷰어 금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