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과의 수다 한 잔


인터뷰 <나운규 프로덕숀> 윤 진 감독


Q. 두 번째 연출 작품이다. 어떻게 연출을 맡게 되었나?

연기 전공이라 배우를 먼저 시작했다. 처음에는 출연기회를 얻기 힘들어 주연을 맡기 위해 연출을 했다. 그리고 첫 작품을 연출하면서 알게 된 어느 감독님이 한 작품을 맡아보라는 제의를 주셨다. 나운규 선생님의 서거 80주년을 기리는 독립운동가를 위한 기획영화였다. 써 놓은 시나리오가 그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운규 선생님의 이야기를 가져와 시나리오를 다시 썼다. 평소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을 두고 있어서 가능했다.



Q. ⟨나운규 프로덕숀⟩(2017)은 어떤 의미의 영화인가?

⟨나운규 프로덕숀⟩은 9월 15일에 예산을 지급받고 시작하여 10월 8일에 완성해야 하는 영화였다. 추석 연휴가 끼어 있는, 3주 정도의 촉박한 시간 안에 완성해야 했다. 처음에는 대전현충원에서 시작을 생각하다가 아닌 거 같아서 로케이션을 바꿨다. 제작 여건 때문에 로케이션이 계속 바뀌었다. 또, 하루 만에 찍어야 했다. 배우는 대학 때 별명이 나운규였던 김용삼 감독한테 주연을 부탁했는데 스케줄이 맞지 않았다. 결국 촉박한 일정을 맞추기 위해 내가 출연했다. 제작을 모두 마치고는 사실 영화제에 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스태프들이 모두 대구 사람이고 대구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대구단편영화제에 출품했다. 본선에 뽑히고서 스태프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고맙다고 말할 수 있었다. 영화제를 통해 이 영화의 목적을 다 이뤘다고 본다. 만족스럽다.



Q. 영화의 마지막에 겹쳐서 보이는 초상은 어떤 의미인지?

사진을 넣는 것은 처음부터 생각했었다. 사진이 나오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았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나운규 선생님이 다시 환생하여 지금의 우리나라를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실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나운규 선생님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배우를 할 때도 ‘구한말’의 이미지가 있다는 말을 들어봤다. 그리고 요즘 독립영화를 보다 보면 실험 영화가 많은데, 우리나라 1세대의 영화를 다루 고 싶었다. 또,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의 무표정하면서도 코믹스러운 느낌이 좋고, 제작과 연출과 편집을 다하는 영화 제작자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버스터 키튼 같은 인물이 있다면 바로 나운규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다.



Q. 왜 타이틀의 마지막 글자가 ‘션’이 아니라 ‘숀’인가?

당시의 언어를 쓰고 싶었다. 일제강점기에 프로덕션은 ‘프로덕숀’으로 쓰였다. 그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Q. 왜 영화 속 배경은 1929년인가? 나운규 프로덕션의 해체와 관련되어 있나?

그 때는 일제의 문화통치 시기였다. 당시 일제는 필름과 같은 작품들을 많이 압수했고 검열도 심했다. 그리고 30년대부터는 강압통치가 시작되었으니 29년에는 문화통치가 절정에 이르러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Q. 극의 초중반은 왜 무성영화로 구성되었는가?

처음에는 옛날 영화처럼 무성영화의 형식을 빌려와서 나레이션을 하며 변사의 역할을 할까 싶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코믹한 느낌이 될 것 같아서 긴급함을 살리기 위해 몽타주가 흘러가는 방식으로 정했다. 긴박한 느낌을 받았다면 무성 영화로 하길 잘한 것 같다. 그리고 재편집을 할 때 필름 효과를 넣었다. 넣고 나니 더욱 느낌이 살아나서 좋았다.



Q. ‘아리랑’이라는 투박한 세 글자가 인상 깊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했나?

⟨아리랑⟩(1926)의 필름이 지금 없기 때문에 그 필름을 인상 깊게 드러내고 싶었다. 그 필름을 찾고 싶은 마음도 담았다. 나운규 선생님의 아드님이나 손자분까지도 찾으러 다녔지만 찾지 못했다. ⟨아리랑⟩이 상영할 당시에는 지금의 ‘천만 영화’와 비슷해서, 상영하던 대구 만경관의 2층이 무너질 정도로 관객이 많이 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들쥐⟩(1927)나 ⟨오몽녀⟩(1937) 같은 작품도 있지만, 선생님이 직접 쓰신 대표작이자 우리나라의 정서가 담긴 ⟨아리랑⟩을 찾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고 싶었다.



Q. ⟨아리랑⟩을 지키고자 총을 쏘는 남자의 심정도 같은 마음이었나?

그렇다. 필름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순사’ 역할로도 등장했는데, ‘나운규’가 ‘순사’를 쏘는 것으로 내 심정을 드러내고자 했다. 나운규 선생님도 흔들리는 시기가 있었 을 것이다. ‘순사’가 자신을 잡으러 왔을 때 그것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Q. 초상이 나오기 전에 스태프들이 등장하는데, 어떤 의미인가?

원래 시나리오상에서는 없었다. 시나리오에는 혼자 나오는 컷이었다. 막상 찍고 보니 외로워 보였다. 자료 조사를 하며 찾았던 ⟨아리랑⟩의 현장 사진에서 큰 카메라 주위로 스태프들이 서 있 던 모습이 생각났다. 영화 촬영의 현장을 드러내고 싶어서 현장에서 수정했다. 그리고 나운규 선생님도 동료들과 트러블이 많았기도 했지만, 도와주는 동료들이 있었기에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도 다 같이 등장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Q. 이 영화는 우리나라 영화의 1세대를 기리고 있다. 자신에게 있어서 영화는 어떤 의미인가?

어떤 의미랄까, 영화는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현실, 공간, 살아가는 게 모두 영화로 표현되는 것이라 살아가는 게 영화라고 생각한다. 감정이 움직였을 때, 그것을 전달하고자 할 때 필요한 것 같다.



Q. 평소 어떤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지?

먼저 배우를 시작하면서 캐릭터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관찰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답답하거나 막막할 때면 서울역에 자주 간다. 서울역에 가면 사람들의 행동이나 모습이 정말 다양하다. 노숙인들의 모습부터 ‘다시 일어서기’, 헌혈... 대합실에 들어가면 만남의 장이자 헤어짐의 장이기도 하니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간다. 때로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리고 길가다가 전단지 나눠 주시는 할머니들이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날씨에서도 서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뭔가 뭉클할 때가 있다. 옆에서 장사하시는 노점상 할아버지가 마스크를 주 기도 했다. 이렇게 관찰한 것을 포스트잇에 적어 벽에 붙여 놓는다.



Q. 연출 의도와 지금의 고민이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는가?

나운규 선생님도 독립운동을 어렵게 실천해왔다. 스스로가 ‘일제에 굴하지 않고 총을 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연출했다. 배우를 하면서 계속 삶을 유지하고 싶지만, 다른 직장을 가진다면 안주할 것  같다. 다시 배우로 돌아올 용기가 있을까? 누군가 달콤한 제안을 하면 솔깃하겠지만, 가급적이면 영화를 계속하기 위해 연출과 제작을 했다. 영화 현장에 계속 있고 싶다.



Q.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가?

무거운 이야기를 다루는 어두운 영화보다 밝고 코믹한 영화를 하고 싶다. 코미디라고 하면 너무 쉽게 보기들 하지만, 코미디에도 많은 고민이 담긴다고 생각한다. 내가 잘하는 부분,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영화를 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스릴러 영화를 잘 못 본다. 스릴러를 보고 나면 잔상이 강하게 남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작이 아니라 연기를 한다면 스릴러를 해보고 싶다.



Q. 연기에 대한 욕심이 큰 것 같다.

어디까지나 연기 욕심이 더 많다. 사실 연출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힘을 쏟는 부분이 약해 지지 않을까?’하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첫 연출 때는 ‘이게 마지막이다. 미련 없이 다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했다. 그래서 확답은 못 하겠지만, 만약 연기와 연출을 동시에 제안받으면 연기를 하고 싶다.



Q.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있나?

⟨영천⟩이라는 작품을 7월 25일, 26일부터 찍으려고 하고 있다. 다문화가정이 되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복을 추구하다가 화를 입게 되는 이야기다. 시나리오 작업은 거의 마쳤는데 끝을 고민하고 있다. 더 코믹한 영화가 되기를 원한다.




취재/글  최준하